박형진展-새싹이 있는 풍경

통인 옥션갤러리 8월17일~9월14일

아트데일리 기자 | 2011.08.24 08: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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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커다란 새싹 A considerably huge sprou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 2011     © 아트데일리

 
박형진 작품전 ‘새싹이 있는 풍경’이 서울 관훈동 통인 옥션갤러리에서 8월17일부터 전시중이다.

작가의 작품에는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이 녹아 있다.
그녀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아이와 사물들은 작품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반드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한다.

새싹이 움트는 순간, 그 곁에서 지켜봐 주고 머물러 주는 아이와 강아지는 때론 커다랗게 솓아난 싹 아래서 쉼을 갖기도 한다. 아름다운 색채와 친근한 캐릭터와 같은 표피적 이미지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끌어 안는 관계성을 통해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다. 치열한 삶 속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따스한 시선과 긍정적 메시지는 이상적인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의미있는 빛을 내뿜는다.

전시는 9월14일까지. 화요일은 휴관.
(02-733-4867)
/아트데일리

▲ 상당히 커다란 새싹 A considerably huge sprou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11     © 아트데일리

<전시 해설>

삶의 정원, 존재론적 정원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을 크고 선명하게, 그리고 내게서 멀어질수록 작고 애매하게 그리는 것을 원근법이라고 한다. 원근법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의 결과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인문학의 발명품이다. 나를 세계의 중심에 세우려는 기획이며, 소실점에 해당하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기획의 결과물이다. 코기토 에르고 줌으로 나타난 데카르트의 전언에 대한 회화의 응답이며, 서양의 주체사상과 자의식의 발생을 뒷받침하는 예술의 화답이다. 신본주의로부터 인본주의로 시대정신의 패권을 이양 받는 과정에서의 인문학적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보면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지각하고 인식하는 종합적 행위이다. 정신의 역할을 시각이 대리하는 것이며, 이때의 시각은 사실상 작은 정신으로 부를 만하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는 대신 주관적으로 본다. 그 주관적인 시각의 여하에 따라서 보는 방법은 천태만상으로 분기된다. 세계를 보는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가 가능해지고, 그럼으로써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의 차이와 다름이 가능해진다. 세계관이란 바로 이런 의미일 터이다.

이처럼 본다는 것은 주체를 매개하고(특히 사르트르에게서), 권력을 매개하고(특히 미셀 푸코에게서), 무의식을 매개하고(특히 자크 라캉에게서), 이데올로기를 매개한다. 주관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이해관계의 통로와 채널 역할을 하는 것. 실제로 세상에는 서양의 원근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며, 이로써 다른 세계관을 발생하고 발전시킨 사례들이 많다.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 화가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크게 그리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적게 그렸다. 전형적인 계급미술이며 하이어라키 미술이다.
▲ 새싹 The sprou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27.4cm_2010~11     © 아트데일리

그리고 동양의 고지도는 세계를 평면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그려져 있다. 특정의 소실점이 따로 없는 다시점을 적용해 그린 것이다. 그런가하면 어린아이들은 자기에게 친숙한 것을 세세하게 그리고, 낯 설은 것은 대충 그린다. 이런 사례들은 보는 것이 보는 주체와 긴밀하게 연동돼 있으며, 본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재현이 그저 세계의 감각적 닮은꼴이기보다는 주체의 세계관이 투사되고 투영된 것임을 말해준다. 세계의 감각적 닮은꼴이 아니라, 주체의 세계관이 재현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원근법은 다만 세계를 보는 한 방법일 뿐이다. 원근법이나 탈원근법은 단순히 보는 것에만 관계되지가 않는다. 보는 것은 곧 지각과 인식의 문제인 것이며, 주체의 세계관을 형성시켜주는 문제인 것이며, 결국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기보다는 구성하는 문제인 것이다. 박형진의 그림은 한눈에도 원근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탈원근법과 함께 평면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원근법과는 다른 시점, 다른 시각을 취함에 따라서 그림의 의미내용이 바뀌고 형식도 덩달아 달라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보는 방법이 적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보여진 세계는 또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그럼으로써 그림 속에는 어떤 세계관이 담겨지는지가 궁금해진다. 다소간 양식화된 점을 제외하면 작가의 그림은 무슨 어린아이 그림 같다. 작가는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시각과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어린아이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춰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그대로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어른들이 경유해왔을 유년시절을 반성하고 반추하게 해주는 것이다. 작가는 처음에 아버지의 정원을 그렸었다. 아버지의 정원은 옥상에 있었다. 도심 속 슬라브 건물의 옥상에 둥지를 튼 정원은 그대로 아버지의 세계였다. 아버지의 세계는 정작 자신의 실제가 몸담고 있는 도심이 아니라, 당신의 꿈이 투사된 정원이었다.
▲ 제법 커다란 열매 Quite big frui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11     © 아트데일리

그렇게 아버지는 자신의 꿈이 투자된 정원을 가꾸면서 당신의 세계를 가꾸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정원을 돌보지 않았던 것 같다. 정원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메마른 정원과 함께 아버지의 세계도 덩달아 말라죽었는지도 모를 일이다(이후, 아버지는 양평에 정원이 딸린 집을 지으시고, 그곳으로 정원을 옮기셨다). 정원은 세계다. 아버지의 세계였고,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세계의 부분을 나누어받은 작가 자신의 세계였다. 정원은 단순히 실재하는 장소나 공간적 개념으로서보다는 주체의 세계 내지는 세계관과 연결된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는 경우로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후 좀 더 실제적인 실체를 갖는 것으로 확대 적용된다.

말하자면 정원에 투사된, 혹은 일종의 존재론적 정원으로 표상된 그 세계는 이후 작가의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일정한 변화를 겪게 되고, 크게는 이때 형성된 그림이 변주되거나 심화되면서 현재에까지 연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도심으로부터 전원으로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작가의 그림에는 곧잘 사과밭을 비롯한 과수원과 나무 곧 과실수들이, 다숙이(십년 넘게 가족과 함께하다가 죽은)와 풍기(작가가 사는 동네 이름을 가진) 같은 강아지들과 새들이, 그리고 그동안 새로이 생겨난 아이와 새싹을 비롯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전원생활의 정경이 등장한다. 옥상으로 표상된 아버지의 정원도 그렇지만 이사 이후 전원생활을 소재로 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작가의 관심사는 진작부터 일상 공간 혹은 생활공간으로 부를 만한 권역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론적 심지가 뿌리내린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장소에 정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생활세계(후설과 비트겐슈타인) 개념에의 공감과 함께 또 다른 관점에서의 리얼리티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화면은 대개 하늘과 땅으로 가로질러진다. 땅은 새싹을 틔우거나 나무들을 키운다. 그리고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점점이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아이들이, 강아지들이, 새들이 어우러진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말하자면 일종의 집 같고, 그 집에 거주하는 아이들과 강아지들과 새들이 흡사 하늘과 땅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이다(자연의 자식들?). 이처럼 알만한 형상들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 간에 어떠한 우열도 없고 강약도 없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은 말하자면 똑같은 의미비중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의미론적 평등사상이 그 이면에 깔려 있고, 그 평등이 그림의 평면화의 경향성을 견인한다. 작가의 그림은 어린아이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고 했다.
▲ 진한 포옹 Big hu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72.8cm_2011     © 아트데일리

그 시선에 부합하는 평등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로 하여금 어린아이의 친구가 되게 해준다. 이를테면 일정한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소재들은 저마다의 표정들이 생생하고 여실하다. 흡사 어떤 사건이나 정황에 대해서(예컨대 새싹이 움트는 사건과 그 의미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더불어 서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무심해 보이는 땅과 하늘과 구름마저도. 그 이면에서 일종의 존재론적 유심론과 물아일체 사상(노장), 우주적 살 개념(메를로 퐁티), 그리고 상상계(자크 라캉)와 코라(줄리아 크리스테바) 개념에 대한 공감이 엿보인다. 어린아이에겐 말하자면 자와 타의 구분이 없고, 자기와 대상의 차별이 없다. 모든 차이나고 다른 존재들을 자기의 일부로써 포섭해 들이는 타고난 포용력이 세계를 하나(차이들을 품는 하나)로 받아들이게끔 해준다. 그러므로 흔히 어린아이의 혼잣말은 독백이 아닌 커뮤니케이션(대상을 전제로 한)으로 봐야 하고, 그의 놀라운 상상력 속에서 일원론적 세계가 구성되고 있는 경우로 봐야 한다.

작가의 그림에는 그 세계(어쩌면 그 자체 원형적 세계 내지는 세계의 원형에 해당할 지도 모를)로 인도해주는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모티브가 등장하는데, 새싹과 구슬이 그것이다. 새싹과 구슬은 말하자면 그림에서의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이고 서사적인 구심점 역할을 떠맡고 있다.

새싹 자체는 일종의 세계의 중심이며, 그 세계가 이제 막 싹을 틔우는 경이로운 순간의 감동이 압축된 상징으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새싹이 원형이 되어 이후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고, 집이 되고, 외적이고 내적인 우주로서 부풀려진다는 점에서는 우주와 존재 간의 상호간섭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존재론적 관계를 표상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유리구슬은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표상일 수 있고, 아이에 투사된 작가 자신의(그러므로 모든 어른들의) 유년을 되불러온 일종의 원형적 타임머신의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외에도 작가의 그림에선 사물의 크기나 쓰임새가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경우가 다반산데 어린아이의 상상력과 더불어 구성된 세계며 가변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와는 다른 그림자(이를테면 물고기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새)에서 그림자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감 혹은 좀 더 존재론적으로 말한다면 실패되고 좌절된 욕망(이를테면 물이 그리운 새)과 같은 심리적 사실을 암시한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탓에 가능해진 이 모든 정황들을 그려놓고 있는 그림은 현저하게 탈원근법적이다. 평면적이고(형식적인 면에서) 평등적이고(의미론적인 면에서) 평상적이다(주제와 소재 면에서). 어린아이(어쩌면 작가 자신을 대리할 지도 모를)의 눈에 비친 그 세계상과 더불어 작가는 세상의 모든 차이나는 것들을 끌어안는다.

/글 고충환





원본 기사 보기:ar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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